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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BY-DAY

비극 속에서의 낙관

by 텍스트 마스터 2021. 6. 1.
빅터 프랭클은 많은 저작을 남겼다. 죽음의 수용소 이외에 다른 책도 한번 읽어보려고 했지만 너무 내용이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반복해서 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1장 수용소 이야기, 2장 로고테라피 이야기가 끝나면 3장으로 '비극 속에서 낙관'이라는 짧은 글이 나온다. 빅터 프랭클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강의했던 내용이라고 한다. 짧은 글이지만 내용이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많은 내용을 정리한다는 느낌이 있다. 그러기에 나는 두고두고 다시 읽기 위해서 며칠에 걸쳐서 본문을 옮긴다. 

비극 속에서의 낙관: '고통, 죄, 죽음'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이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세 개의 비극적인 요소에도 인간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 낙관적일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 개의 비극적인 요소는 인간의 삶을 제한하는 '고통, 죄, 죽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 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이 모든 비극에도 어떻게 삶에 대해 '네'라고 대답하는 것이 가능한가?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바꾸면, 이 모든 비극적인 요소에도 어떻게 삶이 그 자신의 잠재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네'라고 대답하는 것', 이 말은 독일어로 쓴 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또한 이 말은 인간이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되기도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중요한 것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최선'은 라틴어로 '옵티멈'이라고 하는데, 내가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낙관은 비극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잠재력이 첫째 고통을 인간적인 성취와 실현으로 바꾸어 놓고, 둘째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셋째 일회적인 삶에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동기를 끌어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 210601

 

비극의 세가지 요소 중 첫 번째: '고통'

행복은 어떤 일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

    하지만 이것 하나는 명심해야 한다. 낙관적인 생각은 명령이나 지시를 받아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모든 가능성과 모든 희망에 대해 가리지 않고 낙관적이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다. 희망에 적용되는 것은 나머지 두 가지에도 적용되는데, 말하자면 믿음과 사랑도 명령하거나 지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유럽 사람의 눈에는 미국 문화가 인간에게 '행복하기를' 끊임없이 강요하고 명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행복은 얻으려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유가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인간적인 현상인 웃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을 웃게 하고 싶으면 그 사람에게 웃을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하면 된다. 즉 우스운 이야기를 해서 그를 웃겨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에게 웃음을 강요해서는 진정한 웃음을 끌어낼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마치 카메라 앞에 선 사람에게 '치즈'라고 말하기를 강요하는 것과 같다. 그런 다음 완성된 사진을 보면 사람들의 얼굴이 작위적인 웃음으로 얼어붙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로고테라피에서는 그런 행동 패턴을 과잉 의도라고 부른다. 과잉 의도는 불감증이든 발기 부전이든 간에 성적인 문제로 인한 신경 질환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자신을 상대방에게 내맡김으로써 자기 자신을 잊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직접적으로 오르가즘, 즉 성적인 쾌락을 과도하게 추구하면 할수록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더 참담한 실패를 맛보게 된다. 소위 '쾌락을 얻어야 한다는 원칙'이 즐거움을 망쳐 버리는 것이다.

사람이 의미를 찾는데 성공하면?

    사람이 일단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하면, 그것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도 준다. 그렇다면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을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아주 치명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 실례로 포로수용소나 강제 수용소와 같은 극한 상황에서 가끔씩 일어나는 일을 생각해 보자. 내가 어떤 미군에게 들은 말인데, 이럴 경우 처음에는 '체념 상태'라고 부르는 행동 패턴이 나타난다고 한다. 강제 수용소에서는 체념 상태가 아침 다섯 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물론, 밖으로 일하러 나가는 것도 거부하고, 대신 막사에 남아 똥과 오줌에 절은 짚더미 위에 누워 있기를 고집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아무것도 그들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 경고나 협박도 소용없다. 그런 다음에 아주 전형적인 행동을 한다. 주머니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담배를 꺼낸 다음 그것을 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그가 앞으로 48시간 안에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한다.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없어지고, 순간적인 쾌락의 추구가 뒤를 잇는 것이다.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보고 있다. 나는 스스로를 '미래가 없는' 세대라고 부르는 젊은이들을 생각해 본다. 이것은 한 나라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런 젊은이들이 위안을 얻는 것이 담배가 아니라 마약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실 마약 문제는 이보다 더 보편적인 집단 현상, 즉 현대 산업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인 실존적 욕구의 좌절에서 나오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의 일면을 반영하는 것이다.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정신병 발병 요인에서 점점 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단 로고테라피 치료 전문가들만이 아니다. 스탠퍼드 대학의 어빈 얄롬은 <실존주의 심리 치료>에서 정신과 외래 병동에서 연속적으로 치료를 받았던 40명의 환자 중 12명이 바로 이 삶의 의미와 관련된 문제로 병을 얻었다고 보고한다. 그곳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팔로알토의 동부 지방에서 조사한 결과도 단지 1퍼센트밖에는 차이가 나지 않았다. 가장 최근 빈에서 실시간 통계 조사를 보면 전체 인구의 29퍼센트가 자신의 삶에서 의미가 실종됐다고 호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원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의미는 없지만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 수단조차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도 있다. 

    이와 관련해 특히 현재 실직 상태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나는 소위 '실업으로 인한 신경 질환'으로 고생하는 젊은 환자 중에서 특별한 종류의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환자를 연구하고 그 결과를 책으로 출판했다. 그 책에서 나는 이런 신경 질환이 두 개의 잘못된 의식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밝혔다.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을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 됐다는 것과 동일시하고, 쓸모없게 됐다는 것을 무의미한 삶을 살게 됐다는 것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나는 환자들에게 청소년 기관이나 성인 교육 기관, 공공 도서관 혹은 이와 비슷한 기관에서 봉사하도록 권유했다. 말하자면 그들이 엄청나게 남아도는 자유 시간을 비록 돈을 받지는 않지만 의미 있는 일에 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자 경제 상황에 변화가 없고 전과 같이 굶주리고 있음에도 그들의 우울증이 사라졌다. 사람이 복지 정책에만 의지해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진 셈이다. 

    한 개인이 처한 사회 경제적 상황이 원인인 실업 신경 질환과 함께 정신 의학이나 생화학적 조건이 원인인 또 다른 유형의 우울증이 있다. 따라서 정신 치료와 약물 치료는 별도로 실시돼야 한다. 하지만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과 관련이 있는 경우에는 그것 자체가 병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점, 자기가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어떤 신경 질환의 표시나 징후라는 점을 간과하거나 잊어서는 안 된다. 비록 병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병적인 증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잠재적으로 병을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실존적 공허감: 곧 허무하고 무의미하다는 생각

    간단하게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집단적 신경 증후군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증후군이 보여 주는 세 가지 단면, 즉 우울증, 공격성, 약물 중독이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실존적 공허감, 곧 허무하고 무의미하다는 생각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증거들은 무수하게 많이 있다. 

    우울증이 모두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고, 자살- 우울증의 결과로 가끔 일어나는 -이 항상 실존적 공허감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모든 자살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도 할지라도 만약 그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의미와 목적을 알았다면 자기 생명을 빼았으려는 충동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 210602

    사람으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갖도록 강하게 이끌어 주는 것이 자살을 방지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면 자살 위험이 있을 때 이것을 중재해 보는 것은 어떨까? 젊었을 때 나는 4년 동안 오스트리아의 한 대형 병원 병동에서 일했다. 그곳에는 아주 상태가 심한 우울증 환자들이 입원해 있었는데, 대부분 자살을 기도한 다음 병원에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언젠가 계산해 봤더니 4년 동안 나는 무려 1만 2천 명의 환자를 치료한 것으로 나왔다. 그런 과정을 통해 엄청나게 많은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고, 지금도 자살을 시도할 성향이 있는 환자를 대할 때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치료한다.

    나는 그런 환자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준다. 자살 기도가 미수에 그친 사람들이 수없이 하는 얘기가 자살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고 말한 사실이다. 자살에 실패한 지 몇 주일 후, 몇 달 후 그리고 몇 년 후 그들은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에도 자기에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고, 의문에 대한 해답이 있었으며, 삶에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비록 사정이 좋아질 확률이 천 분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럼 일이 당신에게 어느 날 조만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우선은 그런 일이 일어나는 날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살아야 하고, 그런 날이 밝아 오는 것을 보기 위해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살아남아야 할 책임감이 당신을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겁니다."

    집단 신경 증후군의 두 번째 요소인 공격성과 관련해서는 캐롤린 우드 셰리프가 주관했던 한 실험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한다. 그녀는 인위적인 방법을 써서 보이 스카우트 그룹들이 서로 공격성을 갖게 했다. 그런 다음 관찰해 보니 소년들이 모두 같은 목표를 가지고 행동할 때에만 공격성이 누그러진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공동의 목표란 자기들이 먹을 음식이 실려 있는 차를 진흙 구덩이에서 꺼내는 일 같은 것을 말한다. 공동의 목표가 생기자마자 자신들의 달성해야 할 목표의 도전을 받았고, 서로 협동하게 됐다. 

    세 번째 문제인 중독에 관해서는 안네마리 폰 포르스트마이어가 발표한 연구 결과가 생각난다. 시험과 통계 자료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그녀는 자신이 조사한 알코올 중독자의 90퍼센트가 스스로 아무 의미가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스탠리 크리프너가 연구했던 약물 중독의 경우에는 환자의 100퍼센트가 만사가 무의미해 보인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삶의 최종적인 의미는 임종 순간에 드러난다

    이제 의미에 대한 질문 그 자체로 돌아가보자.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로고테라피 치료 전문가는 우선 환자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직면했던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에 내재된 잠재적인 의미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전 생애를 포괄하는 총체적인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여기서는 환자의 삶 전체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유사한 예로 영화를 들어 보자. 영화는 수천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장면마다 뜻이 있고 의미가 있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 개별적인 장면들을 보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의 최종적인 의미 역시 임종 순간에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최종적인 의미는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의미가 각 개인의 지식과 믿음에 최선의 상태로 실현됐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로고테라피 치료라는 각도에서 보면, 의미와 그 의미에 대한 인식은 허공에 떠 있다거나 상아탑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된다. 간단하게 말해서 나는 의미에 대한 인식- 하나의 구체적인 상황이 지니고 있는 개인적인 의미에 대한 인식-을 카를 뷜러의 개념과 같은 노선에 있는 '아하' 경험과 베르트하이머 이론에 노선에 있는 게슈탈트 지각 사이에 중간쯤에 놓고 싶다. 의미에 대한 지각은 고전적인 개념의 게슈탈트 지각과는 다르다. 게슈탈트 지각은 어떤 '토대'에서 어떤 '형태'를 갑자기 인식한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 의미에 대한 지각은 현실에 깔려 있는 가능성을 깨닫도록 만든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일이 행해져야 하는가를 깨닫게 한다는 말이다. 

- 카를 뷜러 : 독일 심리학자. 사고를 할 때 심상은 필요하지 않고 심상이 모호해져도 사고는 모호해지지 않으며, 사고는 목적 지향적이고 창조적인 과제 해결을 지향한다고 주장했다. '아하' 경험이란 인간은 '아하 그렇구나'하고 어떤 것을 깨닫는 과정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며, 이 깨달음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이루어진다는 이론을 말한다.
- 게슈탈트 지각 : 형태 심리학파 이론으로, 여러 개의 자극이 존재할 때 인간은 그 자극 하나하나를 지각하기보다 몇 개의 자극을 서로 연관시키거나 분리시켜 하나의 통합된 자극으로 지각한다는 이론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방법을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샬럿 뷜러는 말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인간의 삶이 궁극적으로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사람들이 삶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며 공부하는 것뿐이다." 

    물론 이런 전기적인 접근법에 생물학적인 접근법을 가미할 수도 있다. 로고테라피는 주어진 삶의 조건 속에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지 알려주는 프롬프터로서의 판단력을 갖고 있다. 그럼 과제를 수행해 나가려면 판단력은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에 잣대를 갖다 대야 하고, 상황은 일련의 판단 기준과 가치의 중요도에 따라 평가돼야 한다.

    하지만 이 가치들은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차원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가치들은 우리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그 무엇으로, 인류의 진화 과정을 통해 구체화돼 왔다. 그 가치들은 인간이 하나의 생물로서 살아온 지난날의 역사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심오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콘래드 로렌츠도 '생물학적 아 프리오리' (먼저 이루어진 것부터라는 의미의 라틴어 성구로, '선험적'이라고 번역)라는 개념을 창안하면서 아마 이와 같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최근에 나는 그와 함께 가치를 평가하는 과정에 깔려 있는 생물학적 토대에 대해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전적으로 내 생각에 동의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가치의 문제를 이미 인식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물려받은 생물학적 유산에 그것이 이미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세 가지 길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듯이 사람이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두 번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미는 일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에디트 바이스코프 요엘슨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무엇을 경험하는 것이 무엇을 성취하는 것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는 로고테라피 치료상의 개념'이 정말로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적인 경험의 세계를 희생시키면서 외적인 성취의 세계에만 지나치게 편중되는 것을 보완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로 들어가는 세 번째 길이다.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인간은 개인적인 비극을 승리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앞 장에서 이미 얘기했던 것처럼 에디트 바이스코프 요엘슨은 로고테라피에 대한 희망을 이렇게 피력했다. 

    "로고테라피가 오늘날 미국 문화가 지니고 있는 건전하지 못한 성향을 근절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오늘날 미국에는 자신의 시련을 자랑스러워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그것을 품위 있는 것으로 만들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 치유 불가능한 환자들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불행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나는 인생의 4분의 1을 종합 병원 신경 정신과에서 근무했으며, 그동안 자신의 곤경을 인간적인 성취로 바꾼 환자들의 능력을 보아 왔다. 그런 사례에 덧붙여 인간이 시련 속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실제적인 증거도 있다. 예일 대학교 의과 대학 연구원들은 "베트남전 전쟁 포로 중 포로 생활의 엄청난 스트레스에도 그것이 자기 성장에 도움이 되는 체험이며, 그런 면에서 이로운 점이 있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한 많은 사람들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라고 얘기했다.

    '비극 속에서의 낙관' 중에서 내가 가장 강력하게 동조하는 것은 라틴어로 소위 '인간에 대한 논의'라고 하는 것이다. 제리 롱은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인간 정신의 도전력'을 보여 주는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텍스라카나 가제테>지에 의하면, 제리 롱은 3년 전에 다이빙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 목 아래 부분이 마비됐다. 사고를 당했을 때 그는 17세였다. 요즘 롱은 입에 막대를 물고 타이프를 친다. 그는 특수하게 고안된 전화기를 통해 지역 사회 대학에서 제공하는 강좌를 두 개 듣고 있다. 인터콤이 롱에게 강의를 듣고 교실에서 하는 토론에도 참가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밖에 그는 독서도 하고, 텔레비전도 보고, 글도 쓰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리 롱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 삶이 의미와 목표가 충만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운명에 날에 대한 나의 태도가 삶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신조가 됐습니다. 나는 내 목을 부러뜨렸지만, 내 목이 나를 무너뜨리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대학에서 처음으로 심리학 과목을 듣고 있습니다. 내 장애가 다른 사람들을 돕는 내 능력을 더욱 향상시켜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시련이 없었다면 내가 지금 도달한 인간적인 성숙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 210603

    이 말이 곧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시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2장에서도 얘기했지만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시련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그 시련에서 여전히 유용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피할 수 있는 시련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시련을 견디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 롱은 자기 목을 부러뜨리도록 선택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일 때문에 자기 자신이 무너지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시련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보통 사람들, 글자 그대로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이 말에 동의하고 있다는 실제적인 증거가 있다. 

    최근 오스트리아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를 보면 조사에 응한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사람은 유명한 예술가도 아니고 유명한 과학자도 아니었다. 유명한 정치가도 아니고, 유명한 운동선수도 아니었다. 그들로부터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사람은 당당하게 곤경을 이겨 낸 사람들이었다.

 

비극의 세가지 요소 중 두 번째: '죄'

    이제 비극의 세 가지 요소 중 두 번째에 해당되는 '죄'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죄는 신학적인 개념의 죄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소위 '죄의 미스터리'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죄를 발생시킨 생물적, 심리적 그리고 사회적 배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죄에 대한 최종 분석에서도 여전히 그 죄가 해석 불가능한 것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의 범죄 그 자체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것은 죄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고, 죄지은 사람을 자유 의지와 책임을 지닌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수리해야 할 기계로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심지어 범죄자들조차도 이런 식으로 취급받는 것을 싫어한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책임지기를 원한다. 일리노이에 있는 한 교도소에서 형을 살고 있는 어떤 기결수는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죄수에게는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변명거리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기회만 있었지요. 사회가 비난을 받아야 하는데, 많은 경우 비난의 화살이 그 희생자에게 돌아갑니다. 

    샌틴 교도소 수감자들 앞에서 강의할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인간입니다. 인간으로서 죄를 짓고 죄인이 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죄를 털고 일어나 자기 자신을 초월해서 성장하고,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됨으로써 그 죄를 극복해야 할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내 말을 이해했다. 그 후 프랑크라는 전과자로부터 짧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저는 과거 흉악범이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로고테라피 모임에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27명은 굳게 결속돼 있었으며, 새로 들어온 사람은 처음부터 모임에 있었던 우리들이 힘껏 도와준 덕분에 다시는 감옥에 들어가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오직 한 사람만 다시 감옥에 들어갔는데, 그 사람도 지금은 자유의 몸입니다. 

    집단적인 범죄의 개념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나는 개인적으로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의 행동에 대해, 혹은 다른 집단의 행동에 대해, 혹은 다른 집단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나는 지칠 줄 모르고 집단적인 범죄의 개념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해 왔다. 하지만 이런 고정관념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으려면 요령 있는 가르침이 필요할 때가 많았다.

    한 번은 한 미국 여자로부터 이런 비난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신은 어떻게 아직도 책을 독일어로 쓸 수가 있지요? 그건 아돌프 히틀러가 쓰던 말 아닙니까?" 이 말을 듣고 나는 그녀에게 집 부엌에 칼이 있는지 물었다. 그녀가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당황스럽고 놀랍다는 제스처를 쓰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살인자들이 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찌르고 죽였는데 어떻게 아직도 칼을 사용할 수가 있지요?" 그 말을 듣고 그녀는 더 이상 내가 독일어로 책을 쓰는 것을 비난하지 않았다. 

 

비극의 세가지 요소 중 세 번째: '죽음'

    비극의 세 가지 요소 중 세 번째 것은 죽음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삶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삶의 순간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시간들은 끊임없이 죽어 가고 있으며, 지나간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삶의 일회성이야말로 우리에게 삶의 각 순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분명 그렇게 따라서 나는 이렇게 권한다.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적절하게 행동할 기회와 의미를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은 실제로 우리 삶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영향을 받는다. 물론 잠재적 가능성 그 자체도 큰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기회를 써버리자마자 그리고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키자마자 단번에 모든 일을 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과거 속으로 보내고, 그것을 그 속에서 안전하게 전달되고 보존된다. 과거 속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모든 것들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저장되고 보존된다. 사람들은 그루터기만 남은 일회성이라는 밭만 보고, 자기 인생의 수확물을 쌓아 놓은 과거라는 충만한 곡물 창고를 간과하고 잃어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수확물에는 그가 해 놓은 일,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용기와 품위를 가지고 견딘 시련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나이 든 사람을 불쌍하게 여길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은 나이 든 사람들을 부러워해야 한다. 물론 나이 든 사람에게는 미래도 없고, 기회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 대신 과거 속 실체, 즉 그들이 실현시켰던 잠재적 가능성들, 그들이 성취했던 의미들, 그들이 깨달았던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어느 누구도 과거가 지닌 이 자산들을 가져갈 수 없다. 

 

맺으며: 삶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

    시련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의 견지에서 보자면 삶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다. 적어도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의미는 각 개인이 지닌 절대적인 가치와 보조를 같이한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은 잠재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가치는 언제나 그 사람과 함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이 과거에 실현시킨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그 사람이 쓸모 있느냐 없느냐 하는 조건에 기반을 둔 것은 절대 아니다. 

    좀 더 자세하기 말하자면 이런 유용성은 그 사람이 사회에 이로운 존재인가 아닌가 하는 기능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춰 정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사람이 이루어 낸 성과를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행복한 사람, 특히 젊은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 요즘 사회의 특징이다. 

    실제로 이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가치를 무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과 인간의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차이를 애매모호한 것으로 만든다. 

    만약 이런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의 가치가 오로지 현재 그 사람이 지닌 유용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히틀러에 계획에 따라 자행된 안락사, 즉 나이가 들어서, 불치의 병에 걸려서,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해서, 혹은 고통스러운 어떤 장애 때문에 사회적으로 더 이상 쓸모없게 된 사람들을 죽였던 '자비로운' 행위에 대해 변명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오로지 개인적인 모순의 탓으로 돌려 버린다.

    인간의 존엄성을 단순한 유용성과 혼동하는 것은 개념상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개념상의 혼동의 근원은 현재 대학 캠퍼스는 물론, 정신 분석 치료실까지 널리 퍼져 있는 현대의 허무주의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심지어는 정신 분석을 훈련하는 과정에서도 그런 세뇌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다. 

    허무주의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조지 사전트가 이것을 '학습된 무의미함'이라고 한 것은 전적으로 맞는 표현이다. 그는 자기에게 이렇게 말했던 치료사를 기억하고 있다.

    "조지, 당신은 세상이 그저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의란 없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입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세상에 위대한 목표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그것일 뿐이지요. 당신이 오늘 어떻게 행동할까 결정하는 행위에는 아무 특별한 의미도 없습니다."

    이런 비판을 일반화해서는 안된다. 원칙적으로 볼 때 훈련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치료사는 훈련받는 사람에게 자신의 허무주의를 방어하려는 도구로서 냉소주의를 심어 주기보다는 허무주의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 주어야 한다. 

    로고테라피 치료사들이 다른 정신 치료 학파에서 규정해 놓은 훈련 내용과 면허요건을 따를 수도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필요하다면 늑대들과 함께 울부짖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늑대의 탈을 뒤집어쓴 양이되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기본 개념과 로고테라피에 고유한 인생철학의 원칙에 충실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음과 같은 사실로 비추어 볼 때, 로고테라피가 그런 충실함을 유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엘리자베스 루카스는 "정신 치료 역사상 로고테라피만큼 독단적이지 않은 학파는 이제까지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나는 제1회 로고테라피 세계대회에서 정신 치료를 다시 인간 중심적으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로고테라피의 탈지도자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나의 관심은 '주인의 목소리'를 그저 흉내 내기만 하는 앵무새를 키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횃불을 독립적이고, 독창적이고,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영혼에게 전달하는 데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굶주림에 시달리도록 해 보자. 배고픔이라는 절박한 압박이 점점 커짐에 따라 개인의 차이는 모호해지고, 그 대신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표현하는 단 하나의 목소리만 나타나게 된다. 

    감사하게도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강제 수용소 안에서 일어난 일을 몰랐다. 그의 환자는 빅토리아풍으로 호화롭게 디자인된 침상에 누워 있었지 아우슈비츠의 오물더미 위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말과는 달리 강제 수용소에서는 '개인적인 차이'가 모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차이점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은 가면을 벗고, 돼지와 성자의 두 부류로 나뉘었다. 그런 것을 경험한 후 우리는 더 이상 '성자'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게 됐다. 나는 맥시밀리언 콜베 신부를 생각한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결국 석탄산 주사를 맞고 살해됐다. 그리고 1983년에 성자로 추대됐다. 

    여러분은 원칙에 어긋나는 예외적인 경우만 들었다고 나를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힘들다. 스피노자 <윤리학>의 마지막 문장이다.

    여러분은 우리가 굳이 '성자'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저 '훌륭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소수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소수의 반열에 합류하려는 도전 의지를 본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지금 아주 좋지 않은 상태에 있고, 우리 각자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더욱더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경계심을 갖자. 두 가지 측면에서의 경계심을. 

    아우슈비츠 이후 우리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됐다. 그리고 히로시마 이후 우리는 무엇이 위험한지 알게 됐다. // 210604